완전성의 불완전함
영화 : 와즈다(하이파 알 만수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
책 :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오은경)
완전성의 불완전함
당신은 지금 무언가를 욕망하는가?
필자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층위의 욕망을 느낀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혹자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는 영화를 보면서 성욕을 느낄 것이고, 혹자는 영화에서 나오는 음식을 보고 식욕을 느낄 것이고, 혹자는 글을 읽으면서 너무 지루해 수면욕을 느낄 수도 있다. 본능에 따른 욕망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돈을 잘 벌고 싶은 욕망이 있고, 높은 지위에 대한 권력욕이 있다. 또는 완벽한 이성을 만나고 싶은 사랑에 대한 욕망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욕망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러한 욕망의 대상이 ‘지금’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에 대해 욕망을 느끼면서 발전을 하고,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곤 한다. 완전함에 대한 추구가 인간의 진보를 낳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이 지금, 현재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명명한다. 즉, 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 자체는 ‘정상’, 이른바 ‘정상’적인 행위에 반하는 행위는 ‘비정상’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성 간의 사랑이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이 이성애적인 사랑을 한다는 귀납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경험론적인 논리일 뿐이고, 동성애라는 ‘예외사항’은 이 논리구조가 ‘참’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뜨려 버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논리구조의 빈약함을 ‘비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하여 ‘완전함’을 수호하고자 한다. 결국 현재 사회의 인간은 완전함에 대한 정신병적인 강박증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을 믿지 않고, 이를 ‘비정상’이라는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함’에 대한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완전함’은 하나의 이데아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지향점인 것은 분명하나, 이는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완벽한 ‘점’을 머리 속으로 상상하지만 우리가 그려내는 ‘점’은 완전한 점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플라톤의 사상과 일치한다.
오은경은 이슬람세계에서 차별받는 여성의 권력구조를 완전성을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이슬람세계에서 여성은 베일을 쓴다. 이 베일은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남성의 욕구를 증가시켜주는 페티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페티시즘은 본래 어머니에게 팔루스(페니스에 부여하는 사회문화적 권력)가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환상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는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라는 잘못된 완전성을 기반으로 여성을 평가하기 때문에 불완전성의 대체물로 베일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슬람에서 아직도 행해지는 할례 역시 완전성에 기반한 행위이다. 할례를 함으로써 여성들은 새로운 자격을 얻고 출산이라는 상징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는 여성이 사회구조적으로 완전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할례를 함으로써 여성의 성욕은 저하되고, 남성은 욕망대로 일부다처제가 가능하게 된다. 이는 곧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완전함’을 유지시켜주는 제도가 되는 것이다. 명예살인 역시 순수혈통이라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인륜적 행위이다. 순수혈통을 유지하는 것에 여성이 동조하지 않자,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들이 선택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은 여성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의 결핍을 인정하지 않은 완전성에 대한 욕망은 현재의 불완전성을 여성억압의 기제로 해결하려는 형태도 이슬람사회에 표출되는 것이다.
영화 와즈다에서 ‘자전거’는 이러한 완전성에 대한 도전의 상징적 기제이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없다는 사회적 관습의 형태는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면 안된다’는 금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중반부에 와즈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전거 타는 모습을 들키자 넘어진다. 어머니는 와즈다가 피가 난다는 말에 “처녀막이 찢어졌니?”라는 말을 한다. 이는 자전거를 타면 안된다는 금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의 처녀막은 결혼 전에 소멸되면 안된다”는 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곧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과의 첫 관계에 처녀막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 이는 ‘처녀막’이라는 상징기제가 남성중심적인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기호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고, 처녀막이라는 상징기제는 확대되어 또 다른 상징기제인 자전거로 확산, 발전된 것이다. 이렇게 이슬람사회의 각종 기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남성성의 완전함을 극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와즈다는 이러한 남성중심주의의 완전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린다. ‘자전거’라는 상징적 기제를 통해서 금기를 위반하고, 금기를 위반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게 화면에 그려진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도 영화는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완전성에 대한 도전을 그려낸다. 영화에서 아델은 현실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상을 추구하는 엠마와는 다른 현실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사랑에 대한 완전성에 대한 관습대로 학교의 킹카를 사귄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그녀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그러던 중 엠마를 만나 그는 행복을 느낀다. 주변 친구들은 그녀의 위반행동에 대한 ‘비정상’이라의 기치를 내걸며 비난을 한다. 하지만, 아델은 완전성의 이름으로 가려진 사회적 금기에 대해 위반을 행한다. 영화에서 그녀가 엠마와 사랑을 하는 모습은 동성애적인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일반적인 연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다른 연인과 있는 모습을 질투하고, 서로에 대한 권태를 느끼고, 이별 후 다시 그리워하는 모습은 이성 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이는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이고, 완전하다고 말하는 이성적인 사랑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엠마는 아델과 이별 후 새로운 연인 리브를 만난다. 리브는 임신을 하여 아기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사랑의 사회적 기능인 출산이라는 이유로 이성 간의 사랑은 완전하고, 동성 간의 사랑은 불완전하다는 논리에 감독은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엠마와 리브의 사랑은 출산으로 인한 사회화 기능에서 동성 간의 사랑 역시 양육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이성 간의 사랑만이 완전하다는 ‘속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완전함’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완전함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감추고, 금기시하고, 금기를 위반하는 행동을 ‘비정상적’으로 치부하는 행동을 우리 사회가 완전함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그 두려움의 껍질을 한꺼풀씩 벗겨내고, 우리사회가 불완전한 사회가 될 때서야 우리는 욕망에 따라 결핍을 인정하고 보다 진일보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